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트 아데나워 (문단 편집) === [[나치 독일]] 시기 === 독일 전역에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혼란에 힘입어, 양 극단 정치세력인 나치즘과 공산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, 이러한 점은 보수 가톨릭 세력이 강한 라인란트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. 1930년대 이후, 나치는 서서히 지방 의회에서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. 하지만 아데나워 역시 다른 우파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경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쏟았고, 나치즘에 대해서는 경제가 안정되면 사그러들 것이라고 간과하였다.[* 사실 이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관점을 무조건 어리석었다라고 비난하기는 힘든 일이다. [[맥주홀 폭동]] 이후 나치즘이 상당한 지지자를 끌어모았었지만,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20년대의 황금기에 접어들며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자 다시금 2~3%로 지지율이 폭락했었던 사실이 가장 좋은 예이다. 문제는 좌우 가릴 거 없이 히틀러의 정치력을 과소 평가했다는 것이었지만.] 그리고 아데나워가 나치즘의 위험성과 불관용, 배타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[[파울 폰 힌덴부르크|힌덴부르크]]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한 뒤였다.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아데나워와 나치는 정면으로 충돌했다. 결정적인 계기는 [[1933년]] 의회 및 지방선거였다. 선거 과정에서 나치는 쾰른 시청에 [[하켄크로이츠]] 게양을 요구했지만 아데나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. [[히틀러]]가 쾰른을 방문했을 때도 영접을 거부했다. 그러나 그 해 선거에서 "아데나워 물러가라"는 구호를 내세운 나치는 쾰른의 1당이 됐고, 아데나워는 선거 다음 날 쾰른을 탈출해 [[베를린]]에서 몸을 숨긴다. 이후 쾰른 시 의회와 프로이센 주 정부는 나치에 의해 해산되었고, 그 역시 쾰른 시장직에서 파면됐다. 나치의 집요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. 나치는 주택 몰수, 계좌 동결, 정치활동 금지 등을 통해 그를 압박하기 시작한다. 결국 아데나워는 신변의 안전조차 안심할 수 없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약 1년간 은신생활을 한다. 히틀러의 개인 건축가이자, 나중에 군수장관까지 맡는 [[알베르트 슈페어]]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깔끔하게 개발한 쾰른 시가지의 모습에 히틀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. 하지만 아데나워의 정치 성향상 그를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, [[장검의 밤]] 직후 그를 쾰른 시장 재직 시절 각종 직권 남용의 혐의로 투옥시킨다. 다행히도 곧 풀려난 아데나워는 이후 2차 대전 시기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은둔 생활을 해나간다. 하지만 1944년 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]]의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이 터진 이후 나치가 더더욱 광기를 부리면서 그 역시도 다시 강제노동수용소에 투옥된다. 이때 아내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나치가 딸의 신변을 위협하자 겁을 먹은 아내의 실토로 다시 수감된다. 다행히 아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종전까지 은둔한다.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미 첫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었던 아데나워의 아픔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복된다. 그와 함께 수감된 두번째 아내 아우구스테 친서(Auguste Zinsser)는 수감 중에 겪은 [[고문]] 및 남편의 [[은신]]처를 실토했다는 죄책감 등의 후유증으로 1948년 사망한다. 냉철한 편인 아데나워였지만, 두번째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처였고, 이로 인해 생긴 [[우울증]]은 이후 평생 그를 괴롭힌다.[*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총리를 지냈으며, 가톨릭 중앙당 동료였던 [[하인리히 브뤼닝]]은 실처한 직후 아데나워를 만나고는 그의 우울증에 놀라서 "이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군."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